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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자색 숲

그것은…… 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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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카메라, 목탄지, 목탄, 픽사티브, 간이 이젤과 의자, 샌드위치. 다 챙겼나? 아! 식빵. 음. 식빵을 챙겨야지. 샌드위치로 지울 수는 없으니. 오랜만의 목탄화라 그런지 약간 설레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하네. 문대지거나 하진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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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딱 한번 가 보았던 인적 드문 숲. 그 속에서 보았던 보라색 작은 새. 다시 한번 찾기 위해 온 숲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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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버스에서는 거의 못 자는데……. 여기가 어디지?

“기사 아저씨. 여기 어디에요?”
“허허.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탔나? 있어보게. 좋은 곳으로 가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아까 탈 때랑 버스 안이 조금 다른 거 같기도 한데…… 뭐 상관 없겠지?  좋은데 간다고 했으니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암. 것보다 오늘은 왜이리 잠이 오는 건지……. 눈꺼풀이 왜이리 무거운…… 응? 저건?!

“기사 아저씨! 저기! 저기 어디에요?”
“응? 저기 말인가? 글쎄. 나도 처음 보는데. 왜?”
“저기! 절로 가주세요! 제발. 아…… 버스지. 그냥 새워주세요.”
“허허. 걱정 말게. 어차피 손님은 자네 혼자 뿐이니.”

에? 그러고 보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지? 그것보다 이 버스는 대체 뭐 하는 버스야? 이 좁은 길을 어떻게 가는 거야?

“자. 다 왔다네.”
“예. 감사합니다. 수고 하세요.”

어느새 밤이 되었지만 하늘에 뜬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숲은 아름다웠다. 잎사귀 하나 하나에 금박이 씌워진 듯 달빛을 머금은 모습이 금빛의 숲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모습은 전설 속의 ‘엘 도라도’ 같다. 숲 안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하늘엔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지만 활엽수림이라 그런지 숲 안으로 들어오는 달빛은 연하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어두워졌다. 한 두어 시간 걸었나? 숲 안이라 별도 안 보이고 달도 안 보이고 얼마나 주변도 다 비슷비슷해서 그런지…… 응? 여기…… 아까 왔던 거 같기도 한데? 설마 링반데룽? 에이 설마. 그렇게 큰 거 같지도 않던데. 일단 배부터 채울까? 적당한 바위가…… 저기 있네. 흠흠. 맛있는 샌드위치. 적당히 먹고 사진이나 찍어야지. 혹시 정말 링반데룽일지도 모르니 확인은 해야지.

음……. 샌드위치도 다 먹었고 이제 슬슬 일어나…… 아? 반딧불! 얼마 만에 보는……? 반딧불이 원래 보라색 이었나? 군대에서 봤을 때는 녹색이었던 거 같은데. 설마 도깨비 불인가? 설마 숲 안에 무덤이 있을 리는 없고. 아! 사진! 이런 건 사진으로 찍어야지. 일단 후레쉬는 끄고 야간 모드로 맞추고.

‘푸드드득’

새소리? 이 밤에? 부엉이인가? 소리가 들리는 쪽이 저긴가? 자주색 깃털? 자주색 새도 있나? 조류도감을 다 외우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저런 선명한 자줏빛 새가 있다니…. 아! 카메라. 카메라. 이런 건 바로 찍어야지. 조용히 따라가서…….

‘찰칵’

응? 상당히 흐릿한데……. 다시 찍어… 이런! 벌써 저기까지 날아갔나? 거참 디게 빠르네. 쫓아간다. 한 걸음 두 걸음. 계속 뛰어간다. 링반데룽? 상관 없어. 목탄화? 관계없어. 저 놈을 찍을 수만 있다면……. 뛰어간다. 뛰어간다. 점점 뛰어간다. 안으로 들어간다. 깊숙이.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호흡이 가빠라 진다. 이게 사점인가? 머리와 심장으로 피가 모인다.

“헉헉……”

얼마나 뛰었는지 모르겠다. 저놈의 새. 잡히기만 하면……. 아?! 멈췄…….

“안녕하세요?”

엉겅퀴 색의 사브리나 드레스에 상사화 빛 머리카락. 그리고 짙은 자색의 눈동자……. 온 몸이 보랏빛으로 물든 여인…… 아니 소녀인가? 열여섯, 열일곱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작은 바위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다. 은은한 자주색 달빛을 받으…며? 자줏빛 달? 하얗거나 붉거나 노르스름한 달은 봤지만 자줏빛이라니…….

“안녕… 안 하세요?”
“……!”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푸드드득’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아까 보았던 자줏빛 새가 그녀의 어깨에 내려 않는다. 자줏빛 새. 자주색 달. 엉겅퀴 색 드레스, 상사화 빛 머리카락, 자색 눈동자. 자주색 달빛에 물든 숲. 환상? 꿈? 현실? 알 수 없다. 혼란스럽다. 부드러운 달빛. 향긋한 새소리. 달콤한 미풍. 오감이 뒤섞인다. 두 손을 들어 본다. 손이 보인다. 아니 보이는 걸까? 분명 손이 보이긴 하지만 눈으로 보는 건지 알 수 없다. 코로 숨을 크게 들이 마신다. 달콤한 내음. 바람 냄새가 난다. 하지만 바람에 냄새가 있었던가? 귀를 기울인다. 새소리가 들린다. 향긋한 새소리가.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포근하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듯한.

“이리로 오세요.”

소녀, 아니 그녀가 손짓을 한다. 천천히. 나긋나긋한 손짓. 느리지만 확고한, 거절 할 수 없는 달콤한 유혹 같은 그녀의 손짓에 발이 움직인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 열여섯, 열여덟 정도로 보이던 소녀는 어느덧 사라지고 성숙한 여인이 천천히 손짓 하고 있다.

“여기 앉으세요.”

어느덧 그녀의 앞까지 다가갔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그녀의 발치에 두 무릎을 모아서 꿇어 앉는다. 그녀의 손짓에 천천히 고개를 뉘운다. 그녀의 무릎을 벤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부드러운 미풍이 온몸을 감싸는듯하다.  부드럽고 따스한 바람 같은 그녀의 손에 천천히 잠이 든다.

“저거…….”

문득 들려온 그녀의 음성에 잠이 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있다. 하늘에 떠있는 자색 달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떠있다. 어렴풋이 서너 시간은 지난 거 같지만 달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다.

“이젤 아닌가요?”

그녀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보니 이젤과 화구가 든 가방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시나 봐요?”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하지 않고 천천히 일어나 이젤을 펼친다. 가방에서 목탄지를 꺼내고 목탄을 손에 든다. 느릿느릿하게 손이 움직인다. 목탄 특유의 촉감이 전해져 온다. 허락도 맡지 않고 갑자기 그리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생긋 웃으며 자세를 취해준다. 그녀의 어깨에 앉아있던 새도 어느덧 내려와 그녀의 품에 안겨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스케치가 모두 끝나고 목탄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뒤로 쓰러진다. 하늘의 달은 여전히 같은 곳에서 숲을 밝혀주고 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여전히 같은 곳에 떠있는 자주색 달이 떠있고 오감이 뒤섞여 있지만 무섭지가 않다. 어색하지도 않다. 혼란스럽지도 않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에서는. 그녀가 있는 이곳에서는.

그림이 완성된걸 알았는지 그녀가 다가온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숲의 입구에서 본 자주색 반딧불이 그녀를 뒤따라 온다. 자주색 반딧불이 마치 나비처럼 날아든다. 그녀를 뒤따라 올 때도 있고 때론 앞질러 가고 그녀를 감싸고 나선형을 그리며 날아들 때도 있지만 그녀를 뒤따라 온다.

“다 그렸나요?”

그녀가 고개를 숙여 그림을 내려 보려고 한다. 갑자기 쑥스러워 졌다. 급하게 목탄지를 때어 가슴팍에 숨긴다. 얼굴이 화끈해진다. 마치 어렸을 적 빵점 받은 받아쓰기를 남몰래 좋아한 짝꿍에게 들킬까 봐 급하게 감추던 그때의 부끄러움이 되살아 난다.

“아? 안 보여주실 건가요?”

고개를 가로젓는다. 붉어진 얼굴을 혹여 그녀에게 들킬까 급히 고개를 숙인다.

“아쉽네요. 목탄화를 한번 보고 싶은데.”

아쉬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가슴이 아려온다. 하지만 보여주기가 싫다. 아니 부끄럽다. 눈만 살짝 치켜들어 그녀의 표정을 살펴본다.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다시 생긋 웃고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목탄지를 살짝 살펴본다. 픽사티브를 뿌리기 전이라 혹여 문드러지지는 않았나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 이도 그림이 문드러지지는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목탄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거리를 잘 조절해서 픽사티브를 뿌린다.

“와. 정말 예뻐요. 이게 정말 저인가요?”

갑자기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깜짝 놀래서 뒤를 돌아본다. 어느새 뒤로 돌아 왔는지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고 그림을 보고 있다. 깜짝 놀란 나머지 픽사티브를 그녀의 옷에 그대로 뿌려버렸다.

“꺄악!”

그녀도 깜짝 놀랐는지 비명을 지른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고운 아미를 살짝 찌푸리며 그녀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 보다 손으로 만져 본다. 이윽고…….

“풋.”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지 살풋 미소를 짓는다. 혹시 화를 낼까 두려웠다가 그녀의 미소에 다시 마음이 풀린다. 나도 그녀를 따라 웃는다. 그녀가 문득 고개를 돌린다.

“얼마만에……. 정말 얼마만에 느끼는 행복인지 모르겠네요.”

그녀의 말과 함께 다시 보라색의 반딧불들이 피어난다. 그녀와 나를 감싸는 반딧불.. 살픗 눈을 감아본다. 포스하고, 따듯하고, 달콤하고, 안락한 느낌이 온몸을 감싼다. 다시 눈을 뜨니 그녀의 모습이 흐릿해져 간다.

“아아…….”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아아…….”

그녀에게 말을 전해야 하는데. 내가 누구인지, 그녀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그리고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데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모습이 이젠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치 투명한 유리에 그려놓은 그림처럼. 그리고 눈꺼풀이 다시 무거워 진다. 손을 뻗는다 그녀를 잡기 위해. 그녀도 손을 뻗어 준다.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스쳐가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녀가 있었던 흔적조차 전혀 남아있지 않다. 오직 자색의 반딧불만이 주변을 맴돌다 천천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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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디디디. 띠디디디’

미리 맞추어둔 알람소리에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본다. 우거진 수풀. 무성한 활엽수들. 그녀가 있었던 흔적은 어느 곳에도 남아있지 않다. 목탄지에는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작은 제비꽃이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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