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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길 위에서


on the street

비 오는 밤. 노란 가로등 불빛. 그 아래에 그녀가 서 있었다. 그녀의 팔이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칼이 같이 움직였다. -똑똑똑. 그녀의 손목에서 흘러내린 피는 바닥에 고인 빗물과 섞여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입이 열렸다.

-오빠, 내 피에는 얼마나 많은 가치가 있을까? 중세 서양에선 귀족의 피는 blue blood라고 해서 일반인, 평민의 피와는 차별을 두었어. 이 귀족의 피를 흘리게 한 평민은 이유를 불문하고 즉결 처분이 가능 했대. 피는 생명뿐만이 아니라 권력과 명예의 상징이었던 거야. 내 피에는 그 정도의 가치는 없을지 몰라. 하지만 나의 생명이고 우리 부모님이 아닌 이상 그 누구에게도 내어 줄 수는 없어. 지금 이 곳에서 흘러내린 내 피에 걸고 맹세를 할 게 오빠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비를 맞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피를 흘리며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난 그 아름다움에 취해 그녀를 두 팔로 안았다.

-네 맹세……. 가슴에 영원히 간직할게.

다음날 밤 그녀는 자신의 맹세를 지켰고 나는 그녀를 두 번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나의 여인을, 나의 친 동생을

-=

길을 걷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허전함, 외로움, 그리움의 감정들이 생겨났다. 언제나 나의 옆에 있어준 그녀. 동생에서 여인으로 그리고 연인이 되어버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단 한명의 소중한 사람도 지켜 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이제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없지만 아무런 목적 없이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녀를 대신하여…….
문득 다리가 무거워 졌다. 이 길을 끝가지 걸어갈 자신이 없어졌다. 심장에 아련한 통증이 느껴진다. 필시 그녀가 화를 내는 것이렷다.
‘오빠……. 그거밖에 못해? 실망이야’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역시 나의 오빠.’
다시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오빠……. 잘 할 수 있지? 믿어도 되지?’
가슴에 통증이 사라졌다. 발걸음이 가벼워 졌다. 하지만 주저앉아 버리고 싶다.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듣고 싶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나를 믿어 주는 그녀의 기대를 져 버릴 수가 없다. 일순간 세상이 안개에 휩싸인 듯 흐려졌다 곧 맑아진다. 하지만 다시 맑아진 세상은 기이하게 뒤틀려 있다. 건물도, 사람도, 길도. 구름 한 점 없는, 하지만 기이하게 뒤틀린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진다. 손등으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 낸다. 손바닥으로 두 눈두덩을 문지르니 비틀린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 왔다. 날씨는 여전히 화창하고 길은 곧게 이어져있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머리가 무거워 진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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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꽃집이 보인다. 꽃집 앞에는 장미와 백합, 히아신스를 비롯한 많은 꽃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유추프라카치아. 그 꽃도 보였다.

-오빠. 유추프라카치아란 꽃을 알아? 사람의 영혼을 가진 너무나도 고고한 꽃이지. 그 누구라도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면 곧 시들시들해져버려. 그래서 깊은 산 속에서만 사는 꽃이야. 그런데 오빠. 유추프라카치아를 한번 쓰다듬어주면 곧 시들어버리지만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계속해서 같은 사람이 쓰다듬어 주면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살아가는 꽃보다 더 색도 선명하고 싱싱하게 자란대. 어쩌면 그녀는 사람의 영혼을 가져 결백증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어떤 꽃보다도 더 사랑을 갈구 하는 게 아닐까? 전날 스쳐간 손길을 잊지 못해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다 결국에는 시름시름 앓는 걸지도 몰라. 난 이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꽃이 되고 싶어. 저 유추프라카치아가. 그래서 다시 죽을 때까지 평생을 오빠의 손길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어. 나... 그래도 되는 거지?

저 유추프라카치아를 사서 그녀의 무덤에 들러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선 내방 안에 놓아두고 매일 매일 쓰다듬어 줄 것이다. 우츄프라카치아를 사러 꽃집으로 향한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다. 아니 잊은 걸까? 난.. 그녀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머리가 무거워 진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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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문득 옆을 바라보니 무덤이 보였다. 작은 무덤 앞에는 비석과 화환이 놓여 져 있다. 방금 누군가 지나 간 듯 타다만 향이 남아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많은 수의 무덤이 보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동묘지를 걷고 있다. 왜 수많은 무덤 중에 저 무덤이 눈에 뜨인 걸까? 혹시 그녀의 무덤 일지도 모른다. 무덤에 가까이 다가가자 방금 전 까지 못 보았던 꽃이 보인다. 유추프라카치아. 어제... 아니 엊그제 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본 그 꽃집에서 팔던 그 꽃이다. 알 수는 없지만 확신이 든다.
‘안녕 하세요? 좋은 날씨죠?’
고개를 돌리니 한 소녀가 보인다. 눈처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아아... 좋은 날씨야. 그런데... 옷이 장소랑 어울리지 않는데?’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우웅... 역시 그렇죠? 하지만 제가 가장 아끼는 옷이거든요’
분명히 새하얀 드레스는 소녀의 은발과 은색 눈동자에 잘 어울린다. 바닥에 떨어진 향을 주워 불을 붙이고 무덤 앞에 꽂아 둔다.
‘아는 사람인가요?’
‘여동생. 그리고 나의 소중한 연인이었던 사람’
‘헤에... 그것 좀 위험한대요?’
‘인간이란 동물은 언제나 선을 그어 놓기를 좋아하지. 하지만 고작 인간이 그어놓은 선이 신이 정한 운명을 막을 수 있을까?’
‘신은 운명을 정해 주지 않아요. 운명이란 책임을 떠넘기기 좋아하는 인간들의 변명이죠.’
돌아보니 소녀는 꽤나 커다란 회중시계를 손에 들고 있다.
‘그런데 혼자니? 부모님은?’
‘이 무덤... 저도 잘 아는 사람의 무덤이에요. 그리고 사실은 오빠에게 볼 일이 있어서 찾아 온 거예요.’
‘나?’
소녀의 손에 들린 회중시계는 어느 순간 거대한 대 낫으로 바뀌어져 있다.
‘3일간의 유예시간이 모두 지났네요. 오빤 정말 대단해요. 스스로의 힘으로 저승으로 오지 않고 이곳에서 3일이나 버티다니...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네요.’
‘너...’
소녀의 대 낫이 휘둘러진다. 나의 목을 스쳐 지나간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머리가 무거워 진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무덤 앞에 앉아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묘비에 적힌 이름이 똑똑히 보인다.

-=

나는 오빠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맹세를 한 다음날 밤. 오빠는 죽고 말았다. 나를 대신하여 차에 치였다. 음주운전. 너무나도 허무하다. 하루... 나의 피는 고작 하루의 시간 밖에 견디지 못했다.
꽃집에서 꽃을 샀다. 우츄프라카치아. 오빠가 평소에 말한 것처럼 다시 태어났기를 바라며. 오빠의 영혼이 담긴 꽃을 들고 오빠의 무덤으로 찾아가 무덤가에 꽃을 내려놓았다. 향을 피우고 한참을 앉아 있으니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오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다. 순간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오빠가 나타나 눈물을 닦아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빠를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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