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도 모르게 무심결에 중얼거린 말.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습을 들어내는 얼굴 없는 소년과 소녀. 무엇인가를 말하는 소년과 듣고 있는 소녀. 무어인가를 건네주는 소녀와 받는 소년. 소년이 한 말은 들리지 않지만 소녀가 건네준 물건은 보인다. 조금 낡은 회중시계. 초침이 멈추어 있고 짧은 바늘이 9와 10 사이에 긴바늘이 6에 멈추어 있는 시계. 시계 안쪽에서 웃고 있는 그 소녀의 얼굴. 자신의 시계와 똑같은 시계. 소년은 한수였고 소녀는 그때 만난 그 소녀이다. 달빛의 마법은 바다를 거울로 만들었고 잊혀졌던 과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
"날 좋아한다고?"
소녀가 물었다. "응'"
소년이 대답했다. "정말?"
소녀가 물었다. "응'"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이거 받아"
소녀가 시계를 건네줬다. 소년이 시계를 받았다.
"기억하세요. 은빛의 달이 뜨는 날을. 세월의 시계가 한바퀴 도는 그 날을. 라라라라라라...."
소녀가 노래를 부른다. 달이 뜬다. 은색의 달이 뜬다. 은색의 달빛은 바다를 물들인다. 은빛의 바다는 춤을 춘다. 소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소녀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은빛의 달. 은빛의 바다. 은빛의 세상. 시계가 한바퀴 들고나서도 그대가 여전히 여기에 있다면 날 대신해서 달이 그대에게 인사를 할거 에요. 난 달에서 내려온 항아. 라라라라라라...."
돌아간다는 그녀의 노래에 소년은 눈물을 흘린다. 소년의 눈물에 맞춰 바다도 눈물을 흘린다. 바다와 소년의 눈물에 바람이 떠 내려간다. 바람을 따라 소녀의 노래가 흩어진다. 흩어진 노래는 달빛이 되어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리고 소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
거울이 깨어졌다. 배는 여전히 항해를 하고 있고 달은 밝게 빛나며 물방울은 비산한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거울은 없었다.
한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본 환상이 과거라고, 잊혀졌던 진실이라고... 한수에게 그것은 과거여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12년 간의 기다림이. 무너지기 때문에 부셔져 버리기 때문에.... 진실이라면12년 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단 하나의 추억. 약속. 희망.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째깍 째깍 째깍
멈추어버린 낡은 회중시계는 다시 움직여 이제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배에서 내린 한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소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하늘에는 태양이 떠있었고 그 옆에 작지만 분명한 은색의 그 무엇이 떠 있었다. 아주 한 순간 빛나고 사라졌지만 한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달 이였다. 그리고...
"오랜만이네. 약속...잊지 않았구나?"
12년의 시간은 소녀에게도 흘러 이제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약속은...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후후"
조금은 장난스러운 한수의 대답에 소녀가 웃음 짓는다. 그 웃음 따라 바람이 분다. 12년 전에 불었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은빛의 바람 소녀의 웃음은 바람을 타고 흐르다가 12년전의 노래를 만난다.
"기억 하니? 그 노래. 기억하세요. 은빛의 달이 뜨는 날을. 세월의 시계가 한바퀴 도는 그 날을. 라라라라라라...."
"은빛의 달. 은빛의 바다. 은빛의 세상. 시계가 한바퀴 들고나서도 그대가 여전히 여기에 있다면 날 대신해서 달이 그대에게 인사를 할거 에요. 난 달에서 내려온 항아. 라라라라라라...."
소녀의 노래를 이어 한수가 노래를 부른다.
과거의 노래 과거의 바람 현재의 바람 현재의 웃음
하나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12년 전에 멈추어 버린 한수의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거...."
회중시계는 한수에게서 다시 소녀에게로 넘어갔다. 시계바늘은 다시 돌아간다. 1바퀴 느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