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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바다



하얗게 빛나는 달빛.
파도치는 물방울.
달빛에 반짝이는 물방울.
은색의 구슬.
은색의 바다.



"달의 마법. 그리고... 은의 바다?"


-=


띠 - 띠 - 띠 -


'으음..벌써 승선할 시간...인가?'

시간이란 단어와 함께 내려다본 초침이 움직이지 않는 약간은 고풍스러운 회중시계는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승선 시간은 9시 50분부터 10시까지. 이제 막 부저가 울렸으니 20분이 지난 것이리라.

"으음...겨우 하루에 2번 정확하면서  알람좀 울어주면 안되냐? 아직 표 작성도 안 했는데..."

마치 누군가와 이야기 하듯이 시계에 대고 투정을 부리며 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름 박한수..민번810418-1****** 전번.... 음? 폰번적어도 상관없겠지? 011-9374-**** 그리고..에게? 이게 끝이야? 으음 그렇다면.... 시간이 좀 남는데?"

표에 제시된 항목을 다 기입한 한수는 자리에 앉아서 마음을 가라 앉혔다.

'이제 12시간만 기다리면... 12시간이야..'

12년을 기다린 한수에겐 이제 단 12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정확히는 11시간 40분. 배 지연시간을 감안해선 11시간 40~12시간 가량.



띠 - 띠 - 띠 -


'55분인가? 이제 슬슬 승선해야 갰군'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개찰한 후 승선한 한수는 자신의 좌석을 확인했다

"어디 보자... 1층 앞쪽 118번이라...창가 쪽이면 좋은...았싸! 도다리. 지루하진 않겠는데?"

"오늘도 저희 로얄페리를...."

안내방송이 끝나고 배는 천천히 출발 했다.

"여전히 9시 30분이네...흐음...내일 도착시간이 9시30분이니... 딱이군. 하루 2번 맞는 시간이 도착시간 이라.... 왠지 좋은 느낌인걸?"

희미한 미소를 띄며 한수는 시계를 열었고 한 소녀의 사진을 보았다. 12년 전 제주에서 만난 한 소녀의 얼굴.

"후훗...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널 만날 수 있겠네... "

배가 점점 빨라지면서 물보라가 점점 거세어 졌다. 조금씩 튀기던 물방울들이 어느 순간에 하나의 거대한 벽이 되었다.


하얗게 빛나는 달빛.
비산하는 물방울.
달빛에 반짝이는 물방울.
은색의 구슬.
은색의 바다.


"달의 마법. 그리고... 은의 바다.?"

자기도 모르게 무심결에 중얼거린 말.
그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습을 들어내는 얼굴 없는 소년과 소녀.
무엇인가를 말하는 소년과 듣고 있는 소녀.
무어인가를 건네주는 소녀와 받는 소년.
소년이 한 말은 들리지 않지만 소녀가 건네준 물건은 보인다.
조금 낡은 회중시계. 초침이 멈추어 있고 짧은 바늘이 9와 10 사이에 긴바늘이 6에 멈추어 있는 시계. 시계 안쪽에서 웃고 있는 그 소녀의 얼굴.  자신의 시계와 똑같은 시계.
소년은 한수였고 소녀는 그때 만난 그  소녀이다.
달빛의 마법은 바다를 거울로 만들었고 잊혀졌던 과거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


"날 좋아한다고?"

소녀가 물었다.

"응'"

소년이 대답했다.

"정말?"

소녀가 물었다.

"응'"

소년이 대답했다.

"그럼...이거 받아"


소녀가 시계를 건네줬다.
소년이 시계를 받았다.

"기억하세요. 은빛의 달이 뜨는 날을. 세월의 시계가 한바퀴 도는 그 날을. 라라라라라라...."

소녀가 노래를 부른다.
달이 뜬다.
은색의 달이 뜬다.
은색의 달빛은 바다를 물들인다.
은빛의 바다는 춤을 춘다.
소녀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소녀는 계속 노래를 부른다.

"은빛의 달. 은빛의 바다. 은빛의 세상. 시계가 한바퀴 들고나서도 그대가 여전히 여기에 있다면 날 대신해서 달이 그대에게 인사를 할거 에요. 난 달에서 내려온 항아. 라라라라라라...."

돌아간다는 그녀의 노래에 소년은 눈물을 흘린다.
소년의 눈물에 맞춰 바다도 눈물을 흘린다.
바다와 소년의 눈물에 바람이 떠 내려간다.
바람을 따라 소녀의 노래가 흩어진다.
흩어진 노래는 달빛이 되어 주위를 환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리고 소녀는 그렇게 사라졌다.


-=


거울이 깨어졌다.
배는 여전히 항해를 하고 있고 달은 밝게 빛나며 물방울은 비산한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거울은 없었다.

"그건....꿈? 아니면....환상?"

'과거는 아니야, 과거 일리가 없어. 꿈이거나 환상이야'

'꿈이야.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꿈!
환상이야! 환상! 환상! 환상! 환상! 환상! 환상! 환상! 환상! 환상! 환상! '

한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본 환상이 과거라고, 잊혀졌던 진실이라고...
한수에게 그것은 과거여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12년 간의 기다림이. 무너지기 때문에 부셔져 버리기 때문에....
진실이라면12년 동안 자신을 지탱해온 단 하나의 추억. 약속. 희망.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째깍 째깍 째깍

멈추어버린 낡은 회중시계는 다시 움직여 이제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배에서 내린 한수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소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하늘에는 태양이 떠있었고 그 옆에 작지만 분명한 은색의 그 무엇이 떠 있었다.
아주 한 순간 빛나고 사라졌지만 한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달 이였다. 그리고...

"오랜만이네. 약속...잊지 않았구나?"

12년의 시간은 소녀에게도 흘러 이제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약속은...지키라고 있는 거잖아?"

"후후"

조금은 장난스러운 한수의 대답에 소녀가 웃음 짓는다.
그 웃음 따라 바람이 분다.
12년 전에 불었던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은빛의 바람
소녀의 웃음은 바람을 타고 흐르다가 12년전의 노래를 만난다.

"기억 하니? 그 노래. 기억하세요. 은빛의 달이 뜨는 날을. 세월의 시계가 한바퀴 도는 그 날을.  라라라라라라...."

"은빛의 달. 은빛의 바다. 은빛의 세상. 시계가 한바퀴 들고나서도 그대가 여전히 여기에 있다면 날 대신해서 달이 그대에게 인사를 할거 에요. 난 달에서 내려온 항아. 라라라라라라...."

소녀의 노래를 이어 한수가 노래를  부른다.

과거의 노래
과거의 바람
현재의 바람
현재의 웃음

하나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12년 전에 멈추어 버린 한수의 시간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거...."

회중시계는 한수에게서 다시 소녀에게로 넘어갔다.
시계바늘은 다시 돌아간다.
1바퀴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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